2012년 2월 7일, 매서운 겨울 바람을 헤치며 <사진작가 임응식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 회고전> 에 다녀왔다.
임응식(1911 ~ 2001)은 생전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선구자', '사진계의 살아있는 역사', '한국사진의 대부', '한국 현대사진의 선구자' 등 다양한 헌사를 받아왔고, 실제로 사진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사진계몽운동가 및 교육가로 활동하면서 한국 사진의 근대화를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척박하던 한국 사진계의 기틀을 세운 할아버지인만큼, 그에게선 얼리어답터만의 간지가 흘렀다.
대한문 앞에서 티켓을 구입하고 오정택(25, 건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훈련병(진))과 함께 덕수궁 미술관으로 어택 땅. 아쉽게도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한터라 도슨트의 설명은 들을 수 없었지만, 중고생들의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책자, '학생을 위한 감상가이드' 를 득템!
페이지마다 대표적인 사진을 놓고 여러가지로 토론할 수 있는 질문을 함께 엮어서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실 도슨트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전시회에서는 오디오를 활용하곤 하는데, 커뮤니케이션 할 수 없는 오디오의 특징 상 일방적인 설명만이 강요된다. 오히려 이 책자야말로 도슨트와 함께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했다.
(1) 예술사진에서 사진예술로 (1930's ~ 1960's)
1920 ~ 30년대 사진가들은 사진의 사실적이고 선명한 성격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회화적인 (그림같은) 분위기로 사진을 만드는 것이 좀 더 예술적인 사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응식 사진에서도 안개가 덮힌 것 같이 초점이 흐리고 회화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을 당시에는 '살롱사진'이라 불렀다.
< 농가 > (1932)
< 귀로 > (1935)
곽윤섭 기자의 <내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 그림에 비해 정밀성, 사실성이 압도적으로 우월한 사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화처럼 표현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
픽토리얼리즘으로부터 시작된 '살롱사진'의 특징은 자연 관조적이며 탐미적 경향을 띄었으며, 작가 주관적인 감각을 반영하고 회화와 같은 사진 표현효과를 얻기 위하여 여러가지 새로운 사진 제작기법을 개발하고 도입했다. - < 자연주의 사진의 죽음과 살롱사진의 등장 (링크) >
이후 '살롱사진'은 1950년대 이후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현실과 무관하게 형식미만을 추구한다는 이유와 함께 사진의 본래 모습이 아닌 것으로 매도되는 등 부정적인 개념으로 일반화 되었다. '살롱사진'은 점차 사라져갔고, 그 자리를 시대적 정신과 역사를 기록하는 '리얼리즘 사진'이 차지하게 되었다. 임응식의 사진 역시 점차 살롱사진에서 리얼리티를 강조하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살롱사진'에서 '리얼리즘사진' 으로의 변화가 회화적 기법과 형식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그리 온당치 않아 보인다. '수단'이 '주제'를 대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회화적 형식은 '살롱사진'의 관조적이고 탐미적 경향을 따르는 작가의 예술적 욕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정작 당시의 '살롱사진'이 받은 비판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따른 주제 의식의 변화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사진의 형식성에 따른 비판은 최근의 아마추어 사진판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retouch와 resize only로 대표되는 '후보정과 무보정'이 대표적이다. 흔히 무보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후보정에 대하여 그리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비판의 근거도 과거 리얼리즘사진이 살롱사진에 대하여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진의 근본적인 특징인 사실성을 훼손한다는 것.
하지만 후보정을 통한 모든 회화주의적 사진이 사진의 사실성을 훼손하는가? 서로 바라보는 사실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은 아닐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적절한 후보정과 회화적 표현은 무보정보다 사실적일지도 모른다. 실재는 단지 눈으로만 인식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살롱사진'에 대하여 조금 더 찾아보기 위해 RISS 를 뒤졌더니, 리얼리즘사진과 살롱사진 사이의 대립에 관한 재미있는 글이 있었다. 논문이나 학술지를 가까이 하는 대인의 풍모를 과시하기 위해 링크를 걸도록 하겠다. - < 일제시대의 '살롱사진' 형식이 해방 이후의 한국사진에 미친 영향, 박평종 (링크) >
< 소년시절 > 1946
< 노파와 전차 > 1946
< 두 소녀 > 1947
임응식의 초기사진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본 것은 위에 보이는 세 장의 사진이었다. 전시장에서도이 세 장의 사진은 한 곳에 모여 전시되어 있었는데, 같은 주제를 설명하고 있는 사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함께 서있는 소년의 옷차림, 노파와 전차, 그리고 전통적인 차림새의 두 소녀와 저 멀리 보이는 전신주의 대비는 유독 남달리 느껴졌다.
얼마전 동아리 친구 김은선(27,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사람 죽이는데 이유가 없는 사람)의 수상작 < 2011 건대신문 문화상(링크) >을 보면서 느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사진 한 장 속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설명되어 있는, 이른바 촌철살인의 사진.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 동안 건대신문 문화상을 준비하면서 내가 꾸준히 시도해 오던 것은 스토리텔링 기반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부연 설명을 통해 전체적인 흐름을 설명하지 못하면 장면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것이 흠이었다. 특히 <그림자놀이(링크)> 의 경우 추상적인 의식의 흐름을 설명해보려 노력했었지만 타인에 대한 전달력이 없었다는 평을 받으며, 나만의 세계에 갖혀버린 쓰레기가 작품이 되었다. 어쨌거나, 2011 건대신문 문화상 때 만큼이나, 잽이 아닌 카운터펀치를 날려버리는 사진의 미학을 오랜만에 깨닫게 되는 세 장의 사진들이었다.
< 인천성당 > 1950
< 명동거리 > 1950
6·25 전쟁은 나의 사진 이념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이른바 '살롱사진'이라 일컫는 예술사진의 경향에 과감한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기존의 사진 경향은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했을 뿐 현실감각은 전혀 없었다. 인간의 문제, 사회의 문제, 미래의 문제 등 사람이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점에 대해서는 완전히 외면해 버리는 경향을 나는 계속 추종할 수 없었다.「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 임응식 회고록」中
< 나목 > 1953
< 구직 > 1953
위의 두 사진은 모든 전시 사진 중에서도 단순한 기록 이상의 메시지로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던 작품이다. 사실 < 나목 >은 임응식 당신이 설명하기를 " 리얼리즘 사진을 겨냥했으면서도 살롱사진이 워낙 체질화돼 있어서 이런 사진이 나왔다. " 라고 하였는데, 그만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조형적인 미를 갖추고 있는 작품이었다.
< 구직 > 의 경우도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미학자 박평종은 이 사진을 일컬어 한 장의 사진에 전쟁과 실업, 불황, 청년세대의 고민과 방향, 시대의 좌절, 반항의식, 복식과 생활상 등 무수히 많은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고 표현했다.(링크) 특히 저 뒤에 서 겁나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아저씨와의 대비는 연출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든다. 하지만 임응식은 리얼리즘 사진가였기에 아마도 연출과 같은 인위적인 설정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것은 '결정적 순간'인가? 까르띠에 브레송으로 빙의!
< 노점수레 > 1950
< 전쟁고아 > 1950
< 피난 어린이들 > 1950
< 비오는 거리 > 1960
< 절 규 > 1960
이렇듯 임응식은 한국전쟁에서 한국인 최초의 종군 사진사로 활동하였고, 이러한 한국전쟁의 충격 속에서 '생활주의 리얼리즘'이 탄생했다. 전쟁 이후 임응식의 사진들은 사진전의 부제인 '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 처럼 기록이라는 단어에 충실한 것들로 채워지게 된다.
리얼리즘 사진의 계열인 '생활주의 사진'은 사회 현실과 휴머니즘에 입각하여 인간의 생활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젊은 작가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50~60년대 한국사단에서 주류로 자리 잡았다.
(2) 문화재와 예술가의 기록 (1960's ~ 1980's)
1960 ~ 1970년대에는 한국의 전통과 미를 재발견함으로써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세우려는 작업들이 역사, 문학, 미술, 사진 등 여러 분야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임응식은 문화재 사진을 통해 사진이라는 매체가 지닌 기록성과 예술성을 성취하고자 했다.
< 근정전과 사정전 > 1966
< 존덕정 앞뜰 > 1966
문화재 사진을 보면서 문득 느낀 것은 구도를 잡는 게 무척 나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오정택이 왱알앵알 가로되 내 사진은 너무 뻔한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하곤 했었다. 안그래도 최근들어 일부러 몸에 밴 구도를 깨부수려고 이리저리 용써보고 있는 중인데, 문화재 사진들을 보면서 다시 이 같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실제로 과거의 문화재 사진들은 일제에 의해 단순하고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된 편인 반면, 임응식의 사진은 보다 조형성이 강조되었으며 아름다운 화면 구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었다.
< 안익태 > 1955
< 서정주 > 1974
예술인의 초상은 임응식이 건축잡지 『공간』의 주간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연재되었고, 연재가 끝난 후에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속되었다. 초상의 주인공들은 건축가, 서양화가, 서예가, 동양화가, 배우, 작곡가 등 예술인과 문화예술계 인사들로, 사진 속에서 자신의 직업을 대표할 수 있는 포즈를 연출하고 있다.
< 김환기 > 1961
학생가이드에 이 사진과 함께 있던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 Q1. 사진 속 인물의 직업이 무엇일까요? ' 어렵지 않게 그의 손에 들린 붓으로 미술가 정도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진 앞에 섰을 때 재미있는 글을 발견하였다. 인물사진에서만큼은 리얼리즘을 강조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대학선생이면 우선 용의부터 단정히 하고 넥타이를 반드시 매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김환기는 대체로 그것을 무시했다. 청바지에 알룩달룩한 남방 차림으로 선생인지 학생인지 구별이 안되는 자유주의자였다. 내가 찍어 놓은 김환기 사진을 보면 양쪽 차림에 얌전한 모습이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와 정반대이다. 사진이란 이렇게 정반대의 이미지를 영구히 보존하는 장난(?)도 하는 것이다. 그는 결코 얌전한 성격이 아니며 키도 크고 덩치도 우량하고 술먹고 고함지를 때 보면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말타고 호령하는 옛 장수 같았다.「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 임응식 회고록」中
사실 인물사진 파트에서는 임응식의 사진에서 어떤 특별한 감흥을 느끼기 어려웠고, 예술인의 초상은 개인적으로 육명심의 사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카쉬의 사진이 얼굴 속의 명암 하나 하나까지 세심하게 바라보게끔 하였던 것과는 달리 인물을 대표하는 어떤 소품들과 함께 촬영했다는 것 이외에 다른 무언가를 찾기 어려웠다. 계속되는 반복은 지루했다. 그래... 생활주의 사진가인 임응식에게 사교계 스타들의 인물사진이 엄청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얼른 다음 파트로 넘어가야지.
(3) 명동, 명동 사람들 (1950's ~ 1990's)
세번째 파트는 임응식이 추구했던 생활주의 사진이 '명동' 하나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에 종군하여 폐허로 변한 명동을 기록하기 시작한 1950년부터 타계한 해인 2001년 직전까지 50년 넘게 명동을 촬영했다. 임응식은 명동을 " 한국 사회변화의 축소판 " 으로 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하루하루 변하는 명동의 모습을 기록하려고 노력했다.
명동을 주제로 찍기 시작한 것은 50년 9·28 수복 때 인천 상륙작전에서 사진반원으로 종군하여 폐허가 되어 버린 명동의 모습을 비통한 감정으로 찍었던 그때부터이다. 환도 후 줄곧 30년을 두고 이틀이 멀다 하고 시시각각 변모하는 그 모습을 사진에 기록해 왔다. …… 나의 생활 속에서 명동을 떼어놓을 수 없다. 찍고, 찍고 또 찍어도 한없이 찍고 싶다. 명동의 망령이라도 붙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다. - 임응식, 「나의 명동」,『신동아』
한국사회변화의 축소판인 명동, 맞는 말이다. 지금도 명동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최근들어 숙박시설이 엄청나게 많이 생겨나고 있다던데 몇 년만 지나면 또 어떻게 변할 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인터넷 잉여에게 꾸준글이 있듯 작가에게 꾸준한 주제는 그를 표현하는데 무척 중요한 것 같다. 배병우에게 소나무가 있듯, 그리고 김기찬에게 골목길이 있듯, 임응식에겐 명동이 있다.
< 명동부감 > 1954
< 대연각화재, 명동 > 1971
< 핫팬츠 > 1971
1971년에도 핫팬츠를 입을 수 있었나하는 생각에 찾아보니 미니스커트 단속이 시작된 때는 1973년부터였다. 좌측의 한복을 입은 사람과 묘한 대비를 주고 있는 사진이었다. 풍경과, 인물, 그리고 패션 등으로 구성되어 있던 명동의 사진들은 정말 하루하루의 기록 그 자체였다. 발품 짱! 생활주의 사진의 완성은 발에서 이루어진다! 아, 한 가지 더 있다. 노파인더샷!
위의 대표적인 사진 이외에도 인터넷에서 구할 수 없는 여러 노파인더샷이 많이 있었다. 노파인더샷은 말 그대로 직접 보고 찍은 사진들이 아니어서 대개 촬영 지점이 낮은 곳에 위치하고 어긋나거나 잘려나간 프레임이 많았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까닭에 일반적인 사진들보다 더 역동적인 맛이 나곤 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명동 길 한복판에서 이런 노파인더샷을 찍고 있다가는 경찰서에 갈 지도 모를 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혀 다른 목적의식 아래에서 시작된 행동이긴 하지만, 사실상 노파인더샷을 찍고 있는 현장 속에서 작가와 변태를 구별하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 애정남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임응식의 명동을 중심으로 한 꾸준한 사진 기록은 앞서 본 것과 같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높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4) 임응식과 사진 아카이브 에서는,
< 임응식 초상 > 전민조, 1970
임응식이 남긴 유품 및 각종 자료들과 임응식의 초상사진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후학이 많으니스승이 이렇게 빛난다. 한정식 작가가 찍은 사진 중에도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 있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2012년 첫 전시회로 찾아갔던 임응식 사진전, 패션왕에 나오는 간지 폭발의 장면마냥 놀라운 아우라를 느껴서 온몸이 날아가버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자꾸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써 사진을 이해하려고 해왔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던 전시였다. 마무리는 인증으로. 끝!